47일 간의 7가지 단상들
백남준을 이해하는 것은 미디어아티스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그의 예술관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에 쓰인 기술과 조형, 그리고 작품의 맥락을 이해해야한다는 뜻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기술을 선도하거나 예측하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시대적이고 정치적인 혹은 철학적인 맥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재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의 번민을 미리 경험했을 것이다. 반세기 전에 이미 그가 경험한 번민은 그의 작품을 공고히 했을지언정 그를 외돌토리로 만들었을 법하다. 그에 대한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을 되새기며 보낸 몇 주는 과대평가되지 않은 백남준을 사유하게 된 시간이었다. 장문의 추앙을 꾸며내는 것보다는 몇 주간 백남준에 대해 적은 글들을 모아서 가감 없이 나열하고자 한다. 아래 글들은 2011년 3월 28일부터 2011년 5월 15일까지의 짧은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이며, 읽기가 불가능한 글들은 폐기하였고,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다.
1. 형상의 유사성이 있다거나 구현에 있어 특정한 방식을 공유했다고 해서 복제를 단언하는 것은 지나친 과민반응이다. 같은 논리라면 현시대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은 넓은 의미에서 백남준(혹은 그와 동시대 작가들)의 복제품들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보면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백남준은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며, 미학과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가 남긴 지식과 사고의 크기는 너무나 광대해서 그 중 일부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예술가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의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이것이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백남준을 이해해야만하는 소극적인 이유다.
2. 일부 입체주의 작가들도, 일부 미래주의 작가들도, 도시의 상징들을 잇는 레이저 작품을 만들었던 대니 카라반도, 그리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한 시기의 백남준도 당대 물리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작품을 하지 못했을거라 확신한다. 백남준은 시간의 역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 안에서 시공의 붕괴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의 작품들을 구상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3. 마샬 맥루한이 1980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99년부터 난 그의 예언 대부분을 믿지 않았다. 아마 세기말의 호기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백남준은 전자로 충만한 세계가 지닌 긍정적 가능성을 말했지만, 실상 전자는 불확실한 정보와 메시지의 그릇이었다. 전자 미디어는 혼재된 삶을 배경으로 탄생한 괴물들을 배양해왔다. 그는 예언가로 호도되기에 충분히 많은 글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예언가로 비춰지지 않는 이유는 과거의 급진적이고, 과격하고, 고상하지 않은 해프닝들 때문일 것이다.
4. 2011년 어떤 작가는 기자에게 자신을 ‘제2의 백남준’이라고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작품이 백남준의 작품 중 전자와 조형의 결합이라는 극히 일부분의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행하는 가장 큰 실수는 시각조형을 형상화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컴퓨터아트와 알고리즘아트와 같은 기술지향의 예술들이 미디어아트가 붕괴되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지나치지 않다.
5. 일부의 과학 이론과 공학 기술이 우연의 산물이었다고 할지라도 확대해석은 피해야 한다. 예술가와 기술자의 재기발랄한 실험이 새로운 예술 분야 탄생에 초석을 마련한 경우가 있지만 이런 우연을 과학과 공학의 발전 모두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6. 백남준 선생이 비선형 매체의 사용이 상식이 되어버린 현재의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타계한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들에 일부 비선형적인 매체들이 사용되긴 하지만 비선형성이 선형성을 압도할거란 생각에서 그것들을 사용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작품들만 보면 그는 선형적 미디어아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Random Access'를 말하고 있다.
7. 2011년 3월 28일부터 2011년 5월 15일까지, 수 년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혹은 수 주 전에 새로 구입한 백남준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47일을 보냈다. 책들은 나의 가방 속에 위치하며 무릎에 충격과 하중을 증가시켰다. 2011년 4월 11일 수축기 혈압이 174를 기록했으며, 2006년 5월 2일 오후에 다쳤던 우측 슬개골 하단 연골의 상처가 악화되었고, 2011년 5월 4일 중증 지방간 판정을 받았다. 2011년 5월 15일 올해 새로 구상한 내 작품의 아이디어가 1980년에 백남준이 발표한 ‘Random Access Information’에 몇 줄 수준으로 기록된 조롱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